라이프 오브 파이 (2012) - 난파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소년과 호랑이의 생존기

 

 

라이프 오브 파이 (Life of Pi, 2012)

개요: 모험, 드라마, 판타지 / 미국 / 127분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소년 '파이'와 호랑이의 생존기!

<와호장룡>,<브로크백 마운틴>,<색, 계> 등을 통해 인간 내면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표현해낸 이안 감독의 2012년 작품 <라이프 오브 파이>.

영화는 2001년 출판 되어 전 세계적으로 1,000만부 이상의 판매 부수를 기록한 얀 마텔의 소설 'Life of Pi'를 원작으로 한다.

극중 주인공 이름인 파이(Pi). 인도 폰디체리 마을에서 자라난 이 소년은 어린 시절, 현실과 정신세계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했다. 고향에서 두 아이를 기르던 그의 부모는 팍팍한 삶에 지쳐 운영하던 동물원을 정리하고 아들과 함께 캐나다로의 이민 길에 오른다.

 

하지만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우에 화물선이 그만 침몰하고 작은 아들 파이(수라즈 샤르마)만이 목숨을 건지는데.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가운데 가까스로 바다에 띄워진 구명보트. 거기에는 예전 동물원에서 기르던 호랑이와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이 올라타 어린 소년과 함께 생활한다.

한 소년과 동물들의 생존을 위한 사투. 벵갈 호랑이의 등장으로 파이와 다른 동물들은 불편하기만 하다. 비록 야생 호랑이는 아니지만 조련사도, 먹을거리도 부족한 상황에 치명적인 공격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맹수의 모습에 소년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태평양 한 가운데서 조난 신세가 된 파이의 이야기는 언뜻 동물들과의 생존기로 보인다. 홀로 외딴 섬에 갇힌 한 남자의 사투를 그린 영화 <캐스트 어웨이>. 톰 행크스 주연의 이 영화는 살아남기 위한 주인공의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과 무인도에서의 외로운 삶을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와는 조금 다른 주제의 영화로 극한 상황 빠진 소년의 고뇌를 디테일하게 그려내는데 집중한다.

이야기가 끝난 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장점: 영상미를 바탕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구성과 연출의 힘

단점: 다소 밋밋한 전개

별점: ★★★★☆

 

 

 

<스포일러, 리뷰, 결말해석>

파이(Pi)의 본래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 오줌을 눈다는 뜻의 pissing과 발음이 비슷해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던 소년은 피신 대신 파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원주율을 뜻하기도 하는 파이(π)의 소수점을 칠판 한가득 쓸 정도로 명석한 구석이 있던 이 소년은 어릴 적부터 특정 종교가 아닌 힌두교, 천주교, 이슬람교 등 여러 종교들을 동시에 믿으며 보편적인 가치를 받아들이는 남다른 영민함을 가지고 있었다.

 

 

추후 믿음에 대한 문제를 좀 더 극적으로 다루고 있긴 하지만 파이의 어린 시절, 극중 과학과 이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걱정하기도 한다.

 

 

서류상의 오류로 사냥꾼과 이름이 바뀐 호랑이 '리처드 파커'. 파커는 난파된 배에서 어렵사리 탈출한 소년과 생존을 위한 여행길에 오른다.

 

 

기나긴 여정 끝에 멕시코 연안에서 구조된 파이. 선박회사 직원들이 찾아와 생존 과정을 듣는데, 미어캣들이 떠다니는 식충섬을 비롯해 오랑우탄이 바나나를 타고 왔다는 둥, 벵골 호랑이와 표류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도무지 믿지 못한다. 보고서를 쓰기 위해 좀 더 믿을만한 이야기를 해 달라는 그들에게 파이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던 파이가 들려준 두 번째 이야기는 이렇다. 주방장과 불자(佛子) 선원, 파이와 그의 엄마 이렇게 네 명이 구명보트에 살아남았고, 보트에 오르는 중에 선원이 다리를 다쳤다. 주방장은 선원의 목숨을 살리고자 그의 다리를 잘라냈지만 결국 죽었고. 이후 죽은 선원을 낚시 미끼로 쓰는 주방장의 잔인함에 몸서리치던 엄마는 그와 말다툼을 벌이고 결국 주방장의 손에 목숨을 잃고 만다. 엄마의 죽음에 이성을 잃은 파이는 다음 날 주방장을 죽이고, 그의 사체를 낚시 미끼로 쓴다. 악마 같은 주방장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하며 자신도 악마가 되어버린 파이.

파이가 들려준 두 이야기를 조합해보면 얼룩말이 선원이고,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죽인 하이에나가 주방장, 오랑우탄은 엄마, 파이는 호랑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둘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파이가 호랑이고, 호랑이가 곧 파이라는 얘기다.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죽인 후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하이에나를 죽이는 장면은, 어머니(오랑우탄)의 죽음에 분노한 파이의 본능이 주방장을 죽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호랑이를 피해 뗏목으로 도망치는 파이의 모습은 호랑이가 구명보트를 점령하듯 파이의 본능이 이성을 지배한 상태임을 암시한다. 

 

 

영화 초반 파이는 여러 가지 종교를 동시에 믿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작가를 향해 말한다. '종교는 방이 많은 집과 같다.' 이는 어쩌면 종교 뿐 아니라 본능과 이성 또한 여러 방에 자리 잡고 있음을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 한 가운데 표류 중, 천막 속에 들어가고 나오기를 반복하는 호랑이. 이는 방 한 켠에 숨어 있다 어느 순간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본능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맹수를 길들이기 위해 호루라기를 부는 파이의 얼굴에 소변을 갈기는 호랑이의 모습은 친구들로부터 오줌싸개라 놀림 받던 소년에게 놀림감의 소재를 이용해 모욕을 주는 듯하다. 마치 오줌싸개란 트라우마가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은 느낌.

 

 

여행의 막바지 주인공이 도달한 식충섬은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섬의 형태와 식충식물 속의 이빨을 통해 파이가 인육을 먹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나이가 든 파이는 작가에게 묻는다. 두 이야기 모두 침몰 원인은 설명이 안 되고 아무도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는데,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드냐고.

 

 

호랑이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는 작가의 말에 파이는 '신의 존재도 믿음의 문제'임을 알려주며 엷은 미소를 짓는다.

영화는 두 이야기 중 무엇이 사실인가에 대한 결론은 알려주지 않는다. 좀 더 사실처럼 들리는 두 번째 이야기 또한 엄마가 바나나 덩어리를 타고 왔다는 부분은 좀체로 믿기 힘들다. 감독은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쟁점을 뒤로하고 본능과 이성, 삶과 죽음, 믿음의 문제에 대한 고민거리를 던지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열린 결말을 통해 몇몇 화두를 던지는 데 성공한 이안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작 <라이프 오브 파이>.